영어이름 짓기보다 한국이름 쓰기

"Eun! 네가 너의 한국 이름을 가지고 일을 하는 건 진짜 좋은 생각인 것 같아. 난 너 이름이 좋아!"

 

 

 

새로운 유니폼을 고르고 쇼핑백에 내 이름을 한글과 영어로 써두었다. 그걸 지켜보던 나의 데퓨티 매니저(한국으로 따지면 스토어 매니저 다음으로 권한이 큰 사람을 말한다.)가 말을 걸었다. 

그리고 그는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난 이 매장 오기 전에 루비자(영국의 액세서리샵) 매니저로도 일했었거든. 거기서 중국애들, 베트 남애들 아시안애들하고 일을 했는데 걔네는 다 영어 이름을 지었어. 로즈, 샬롯 이런 거.. 근데 웃긴 게 뭔지 알아? 걔네는 로즈, 샬롯처럼 안 생겼다는 거야! 내가 커스터머한테 제 동료 샬롯이 당신을 도와드릴 거예요.라고 하고 중국 여자아이를 소개해주면 커스터머는 얼마나 당황하겠니? 걔넨 샬롯이 아니고 로즈도 아니야. 

 

그렇지만 내가 너를 커스터머한테 소개할 때  제 동료 Eun이 그걸 더 잘 알아요, 걔가 당신을 도와드릴 거예요.라고 하고 널 부르면 말이 되지. 안 그래? 당연히 커스터머는 너의 이름만 듣고 네가 아시안이라는 걸 알 수 있으니 찾기도 쉽고. 안 그래?"

 

 

 

 

난 고개를 끄덕였다. 다소 인종차별적인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도 있는 발언이었지만, 그가 어떤 포인트를 가지고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왼쪽: 동료들이 써준 생일축하 카드 내 풀 네임을 영어로 꼭꼭 눌러써주었다  /   오른쪽: 루크 친구 결혼식의 디너테이블 이름표, Eun이라는 짧은 버전 주로 사용한다.

 

 

사실 나도 영어 이름이 있었다. Judy 였다. 주토피아를 보고 주디의 캐릭터가 너무 맘에 들어서 그렇게 지었었다. 그리고 외국애들이 내 이름 중 별이라는 발음을 어려워한다는 걸 알았기에 그들을 배려해 주디라는 영어 이름을 지었던 것이다. 

문제는 가끔 동료들이 주디라는 이름을 불렀을 때 그 콜을 놓칠 때가 종종 있었다. 내 진짜 이름을 두고 주디란 가명으로 사니 그럴 만도 하지. 

 

 

 

 

그렇게 1년 여가량을 주디로 사는데, 조금 서글퍼졌다.

나는 한국인이고 한국에서 나고 자랐는데 다 큰 나이에 영어를 배우겠다고 영국엘 와서 가짜 영어 이름으로 산다는 게. 

내 이름을 지어준 엄마 아빠한테도 못할 짓이고, 자존심이 상했다. 너네가 발음 못하는 게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런던에서의 짬이 좀 생기고 영어도 제법 능숙하게 할 때쯤에 나는 나로 다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외국애들이 내 이름 발음을 할 줄 알건 말건 알바 아니었다. 한국인 "나은별"로 살아가고 싶었다. 

 

 

 

그리고 마지막 직장, 직쏘에서는 애초에 씨브이에 한국 이름만 써서 냈고, 동료들에게도 그렇게 불러달라고 했다. 역시나, 동료들은 내 이름을 몇 번이나 물어보고 자신이 하는 발음이 정확하냐고 몇 번을 물어봤다. 

은별 중에서 별이라는 발음을 유독 힘들어했다. 그래서 나는 그냥 은이라고 불러줘. 너네가 내 이름을 발음 정확히 못하니 그게 편하다면 그렇게 해.라고 선심 쓰듯 말했다. 

 

 

 

 

남자친구가 한글로 써준 내이름 ㅋㅋ

 

 

 

지금은 모두가 Eun이라 부른다. 남자 친구도 처음에는 Eun이라 부르다, 내 본명이 은별이라는 걸 알고, Eun이라는 반쪽짜리 이름으로 사는걸 조금 슬퍼한다는 사실을 안 후에는 꼭 풀 네임으로 불러주려고 노력한다. 

그런 남자 친구에게 " 나 런던 처음 왔을 때 내 이름 뭐였는지 알아? 주디였다? " 하니 남자 친구가 배를 잡고 깔깔 대며 웃었다. 

남자 친구 왈, 영국에서 주디는 굉장히 할머니 이름이란다. 마치 한국에서 미자, 선자라고 하면 나이가 조금 있는 아줌마 이미지가 연상되는 것처럼. 굉장히 오래되고 클래식한 이름. 

남자 친구는 "너의 이미지는 작고 어린 이미지인데 주디라니? 말도 안돼. 이미지와 전혀 어울리지도 않아. 왜 그 이름을 쓴 거야?"라고 되물었다. 

 

 

 

그런 고정관념이 있었던 것 같다. 외국에서 생활하고 유학하려면 글로벌한 영어 이름이 있어야 된다는, 그런 고정관념. 

 

 

 

런던은 각 국의 나라에서 온 이민자들서부터 유러피안들, 관광객들로 뒤섞여져 그 사람들 자체가 런던을 만든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이 어느나라에서 왔고, 자신의 모국어와 문화에 엄청난 프라이드를 가진다. 그래서 내가 아시안이고 한국인이라는 사실 자체가 이미 글로벌함이고 유니크함이기 때문에 나의 정체성을 찾고 남들에게 보여주는 걸 자랑스러워 해야 한다. 

 

 

 

이방인이 되는 거에 머물지 않고 진짜 런더너가 되고 시다면, 그들을 쫒아가는게 아니라 내가 가진 단단한 정체성을 보여주고 자랑스러워해야 한다. 그게 바로 런더너 스피릿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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